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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 4.19 혁명 완전 이해하기

문화 앞잡이 2023. 4. 19.

419혁명 이해하기 포스터
4.19 혁명 완전 이해하기

 

4월이 되면 여러가지 사건들이 생각이 나는데요. 바로 제주 4.3사건과 함께 4.19 혁명입니다.

4.19 혁명은 1960년 4월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 사건입니다.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의 무효와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의식있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초 3월부터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는 사실 이승만 정권교체의 목적도 아니었으며, 어떠한 정치세력도 개입하지도 않았으며, 명확한 목표, 체계화된 조직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그냥 정부의 조치에 불만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말입니다.

한국의 정치적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4.19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제주 4.3 사건이 궁금하다면? 바로가기


1. 4.19 혁명의 배경과 원인

1.1. 대통령 이승만의 종신집권 의지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의 항일 독립 운동의 주인공이며, 국민들에게는 존경과 신뢰를 받았으며, 탁월한 정치적 감각으로 기반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 이후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은 지나친 권위와 엘리트 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종신집권에 대한 욕심과 각종 정치적 비리로 인해 국민들의 지지를 서서히 잃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6.25 한국전쟁 이후 종신집권을 위해 각종 헌법 개헌을 추진하고 반대세력에 대한 정치적 테러 등을 자행하였으며, 자신을 반대하는 국민들을 탄압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망을 점점 잃게 되었습니다.

사사오입개헌

이승만 정권시절, 이승만은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해 중임제한을 없애는 헌법개정을 시도하였는데, 사사오입의 논리를 적용, 정족수 미달의 헌법개정안임에도 불구하고 불법통과를 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해서는 재적 국회의원 203명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36표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했는데, 투표결과 찬성이 135표에 그쳐 부결된 것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재적의원인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므로 이를 사사오입하면 135명이라고 하면서 전날의 부결을 뒤집고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함으로써 사사오입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2. 자유당의 부정선거

사사오입개헌으로 여당이었던 자유당은 점점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선거에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 본격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가게 된 것을 계기로 당초 5월초 계획되었던 선거를 2개월 앞당겨 3.15일에 실시하게 됩니다.

이러한 부정선거 음모는 하급 경찰에 의해 폭로 되었으나, 미국에 머물던 조병옥의 급사함으로 이승만이 압도적인 차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국민들은 그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고 이 부정선거는 국민주권을 짓밟는 행위였습니다.

 

2. 4.19 혁명의 시작

4.19 혁명의 시작은 60. 2월 대구에서 시작하게 되는데 일요일에 모든 초중고 학생들이 등교를 강요당한 사건입니다. 그 당시 일요일이 야당인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유세일인지라 학생들의 유세장 출입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자 특히 야당 후보자의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지 못하도록 한 조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라는 내용으로 대구에서 시위가 시작되었으며, 3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학생들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하지 말자는 취지 였으나, 시위가 거듭될 수록 민주주의 수호,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는 규탄 시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2개월 당겨진 3.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학생들과 시민들도 부정선거에 대한 시위에 참여하게 되는데, 경찰과 정치깡패에 의해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속에 4.11일 행방불명중이던 김주열 학생이 부산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혀 살해된 채로 발견, 이젠 학생뿐만 아니라 국민들까지 동참하는 시위가 시작됩니다. 김주열 학생 사건을 계기로 4.18일 고려대생들의 국회 의사당 앞에서의 민주정치 쟁취, 민주역사 창조를 위한 시위는 모든 학생들이 총궐기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4.19 혁명 당일은 서울 시내의 각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위를 하였으며, 이들의 자극을 받은 고등학생들도 민주화를 위한 시위에 참여하였습니다.

3.15 부정선거를 다시하라, 1인 독재는 물러가라, 대통령은 하야하라

 

시위기간 동안 학생들과 경찰들의 대치는 참혹했습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인한 사상자는 늘어갔으며, 극도로 흥분한 시위대들은 경찰서를 불태우는 등 서울 시내는 거의 무정부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으며, 계엄령까지 선포되기 까지 하였습니다.

이날은 사망자 100여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3. 대통령의 하야

정부는 4.19 혁명 희생자에 대한 책임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로 또 다시 국민들의 분노를 사게 됩니다. 독재정권 타도, 부정선거,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는 시위는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서울의 대학교수 259명이 시국선언문을 채택, 구속학생들의 석방과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면서 시위에 적극적인 동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대통령 하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를 계기로 대통령과의 면담이 진행되는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그리고 이기붕의 퇴임, 내각책임제로 개헌이 확정됩니다.

이후 이기붕 일가가 자살하였음이 확인되었고, 이승만은 몰래 하와이로(도망간것으로 추정) 떠났습니다.

 

마치며

4.19 혁명은 학생과 대중들이 독재정권에 맞서 승리를 쟁취한 청년 민주화 운동입니다.헌법 전문에서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들어가 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나라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1년에 한번이라도 4월에는 4.19 혁명의 의미를 마음속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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